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렸다. 

 얄궂게도 모처럼 만에 아라시가 부활동에 참가한 날이었다.


 날이 조금 흐린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쏟아졌다. 굵은 나무둥치의 마른 땅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고, 운동장 트렉 위에는 곳곳에 물이 고였다. 한창 몸을 풀던 육상부의 세 사람도 비를 피할 틈도 없이 물벼락에 푹 잠겼다. 

 미츠루는 비가 오든 말든 운동장을 내달리려고 했고, 아라시는 그런 미츠루를 요령 좋게 낚아챘다. 아도니스는 사용하던 비품을 들여놓느라 마지막까지 운동장에 남았다. 아라시가 비가 그치고 난 다음에 정리해도 된다고 말려도 고집스레 손만 내저었다.



 "그러다 감기 걸릴 거야!"



 미츠루를 데려가며 못내 한 마디 더했지만, 아도니스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았다. 괜찮다고 한 것 같기도, 어쩌면 얼른 들어가라고 한 것 같기도 했다. 

 과연, 부실로 돌아와서 보니 운동장에 남은 사람이라곤 아도니스뿐이었다.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이라 그런지, 아도니스를 혼자 두고 온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라시에게는 미츠루를 돌봐야 한다는 썩 중요한 사명이 있었다. 실제로 미츠루는 같은 학년인 유닛 후배와 비교해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은 아이였다. 이런 날씨에도 어디든 내달리고 싶어 한다는 점이 꼭 그렇다. 아라시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감기고 뭐고 그런 건 모른다는 천진한 얼굴로 말이지. 아이돌에게 자기 관리란 선택이 아닌 의무인데, 미츠루에게는 조금 먼 이야기인 것 같다. 뭐, 귀여운 후배를 살뜰히 돌보는 것도 선배의 즐거움이니까. 



 "아라시쨩 선배, 머리 정도는 나 혼자서도 말릴 수 있다구."



 꼼꼼하게 물기를 닦아주는 손길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츠루는 내내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아라시가 창밖을 내다보느라 손이 느려진 사이, 미츠루가 눈가를 가린 수건을 손등으로 슬쩍 걷어 올리며 말을 붙였다. 



 "어머 그래?"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구."



 이렇게 어린애 같은 말을 하니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다. 아라시는 머리를 말려주던 것도 깜박 잊어, 무심코 수건을 든 손 그대로 귀여운 후배의 양 뺨을 마구 문질렀다. 축축한 수건에 미츠루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감겼다. 



 "그럼 이제 밖에서 대쉬하지 않을 거야?"

 "으으, 아무리 나라도 그러진 않는다구!"

 "그런 것 치곤 불만 가득한 표정인걸."



 그거언, 하고 답지 않게 말 끝을 늘린 미츠루가 곁눈질을 했다. 빗물이 흐르는 창 밖을 힐끗 본 미츠루는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모처럼 아라시쨩 선배가 나왔다구. 그런 날에 같이 대쉬할 수 없는 건 싫다구."



 정말,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후배라니까. 잠시 저 삐죽 내민 입술을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라시는 후배를 귀여워 해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못 본 척하며 새 수건을 꺼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잘 말려야 한다?"



 다음에 같이 달리자고 어르는 대신, 다소 잔소리하는 투로 말해버렸지만 미츠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뒷정리를 마친 아도니스가 돌아왔다. 당연하게도 콧잔등 위로 달라붙은 머리칼부터 신발까지 푹 젖은 채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철퍽, 철퍽, 물소리가 따라붙었다. 아라시는 아도니스가 지나온 자리마다 떨어질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육상부 부실까지 발자국처럼 남아있을 물웅덩이. 쿠누기 선생님에게 들킬 일이 걱정되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청하고, 비에 젖은 대형견 같은 꼴을 하고 있어서야 잔소리할 마음도 들지 않으니까.

 아라시가 미리 꺼내놓은 수건은 아도니스의 머리에 얹어지기가 무섭게 푹 젖어 들었다. 아도니스는 크게 개의치 않고 머리를 문질렀다. 곧 수건에서도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아라시는 얼른 새 수건을 건넸다. 급하게 뒤적거린 탓에 사물함 안에서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도니스쨩, 샤워실 비었는데 쓸래?"

 "괜찮다. 수건만 있으면 돼."

 "어머, 그래? 정말 괜찮겠어?"

 "나루카미. 나는 이 정도로 감기에 걸리지 않아."

 "아라시쨩 선배, 저기 뭔가 떨어졌다구?"



 아라시와 아도니스는 하던 말을 멈추고 미츠루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작은 도장이 아도니스의 발치를 톡 건드리고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조금 전, 아라시가 사물함에서 수건을 꺼내는 와중에 떨어진 모양이다. 도장을 집어 든 아도니스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부장이 두고 간 건가."

 "뭐? 육상부 도장이었어?"



 아도니스가 도장을 돌려 각인된 부분을 보여주었다. 틀림없다. 구불구불한 서체로 육상부라고 새겨져 있었다.

 육상부 부장, 미케지마 마다라는 현재 부재중이다. 몇 주 째 부활동에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교외로 나갔을 확률이 높다. 그 미케지마 마다라이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라시가 꽤나 불성실한 부원임을 고려했을 때, 부장인 마다라가 아라시와 견줄 만큼 부활동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것도 다른 부원들에게 말도 없이.



 "그게 왜 아라시쨩 선배 사물함에서 나오냐구?"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걸. 어디 간 줄도 모르는 사람 물건이 왜……."

 "그건 내가 넣어놨기 때문이란다!"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다. 

 부실 문이 벌컥 열림과 동시에 무언가 쏟아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목소리로 미루어 봤을때 마다라가 틀림없다. 그러나 세 사람이 본 것은 쇼핑백이 주렁주렁 열린 두 팔과, 사람 키를 훌쩍 넘을 만큼 쌓인 알록달록한 선물 상자였다. 



 "사랑스런 육상부의 아이들아아, 그동안 잘 지냈니이?"



 상자 뒤에서 얼굴을 쏙 내밀며 마다라가 활짝 웃었다. 성큼 부실 안으로 들어와  한쪽 발로 능숙하게 문을 닫는 동안, 그의 품 안에 탑처럼 쌓인 선물 상자들은 유연히 중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묘기나 다름없는 광경에도 세 사람은 영 미적지근한 반응이었고, 마다라는 그런 것쯤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표정들이 왜 그래? 비가 와서 그런가아?"

 "마마, 말도 없이 도장만 두고 사라지는 게 어딨어?" 

 "일이 있어서 잠깐 해외에 다녀왔단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아?"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사람도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꾸할 수 있을까. 당황스러운 걸 넘어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마다라는 이내 손에 든 쇼핑백이며 선물상자를 부산스레 나누기 시작했다. 



 "아니. 처음 듣는다."

 "이건 아도니스상 거란다아"

 "나도."

 "아라시상도 받으렴!"

 "나도 처음 듣는다구."

 "물론! 마마는 미츠루상도 잊지 않았단다아!"



 남의 말을 좀처럼 듣지 않는 것은 여전해서, 세 사람이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주의를 돌리듯 선물을 품에 안긴다. 아도니스에겐 하얀색 오카리나와 통기성이 좋은 운동복, 아라시에게는 고가의 화장품과 액세서리, 미츠루에게는 쿠션이 좋은 운동화와 어느 지역 특산품 정도로 보이는 빵이 각각 돌아갔다.

 줄곧 눈독 들이고 있었던 유명 백화점 브랜드 상표에 혹했던 것도 잠시, 아라시가 단호한 어조로 마마, 하고 불렀다.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던 마다라는 그제야 눈썹을 모았다.



 "어라아. 내가 말하는 걸 잊어버렸나아?"

 "너무 대책 없는 거 아니야? 명색이 육상부 부장이잖아."

 "나루카미 말이 맞다, 부장. 자리를 비울 때는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를 해야 한다."



 손아귀에 힘을 주면 부서질세라 조심스레 오카리나를 매만지던 아도니스도 퍼뜩 말을 보탰다. 마다라를 질책하지 않는 것은 미츠루 뿐이었는데, 처음부터 알록달록한 선물상자에 큰 관심을 보이던 미츠루는 제 몫이 떨어지자마자 포장부터 풀고는 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마다라는 새 신발을 신고 제자리 뛰기를 하는 미츠루를 힐끗 보고는 아라시와 아도니스에게 어깨동무했다. 무겁긴 하지만 못견딜 정도는 아니어서 기우뚱거리지 않고 버티었더니, 그게 또 기뻤는지 큰 소리로 껄껄 웃는다. 



 "부장, 옷이 젖는다."

 "호탕불기! 그런건 신경쓰지마, 아도니스상! 그보다 둘 다 마마를 걱정해줬구나아~ 마마는 기쁘단다!"

 "어머, 나는 마마한테 책임감을 묻고 있는 거라고."

 "걱정한 게 아니었나?"

 "아하하! 가가대소! 아도니스상은 정말 거짓말을 못하네."



 아,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아라시가 호호 웃고는 어깨 아래로 옆구리를 꽉 꼬집자 제아무리 아도니스라도 미간을 구기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게 조금 억울했는지, 오히려 맞지 않냐는듯 아라시를 흘겨보았다.



 "내가 부족한 만큼 두 사람이 맡아주고 있으니까아. 이번만은 봐줘? 선물도 이만큼이나 사온 걸."

 "또, 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아도니스 쨩도 뭐라고 말 좀 해줘."

 "으음." 

 "아도니스 쨩……."

 "오옷, 이 빵 정말 맛있다구! 다들 먹어보라구!"



 어느새 다른 선물 포장을 뜯은 미츠루가 와 하는 탄성과 함께 소리쳤다. 달콤한 냄새가 풍긴다 싶더니 그새 빵 봉투를 뜯은 모양이었다. 제 손바닥만 한 빵을 거침없이 먹어치우고는 세 사람에게 빵을 내밀었다. 딱 봐도 꽤 칼로리가 높아 보이는 종류로,  먹음직스러운 갈색 코팅 사이로 노란 크림이 한가득 보였다. 차례차례 입에 물려주는 가운데 아라시만 거절 대신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나 미츠루는 기어코 빵을 쥐여주고는 만족스레 새 빵을 한 입 물었다.



 "미케쨩 선배, 안에 든 게 뭐냐구? 진득진득한게 흘러넘친다구. "

 "마음에 들어? 요즘 유행하는 악마의 치즈빵이란다~ 맛있는 치즈 크림이 잔뜩 들어있는 게 일품이라고오? "

 "텐마, 입에 크림이 묻었다."

 "다 먹고 나면 경주하자, 미케쨩 선배!"

 "미츠루상은 늘 힘이 넘치네. 좋은 일이야! 하지만 오늘은 어려울 것 같지! 비가 이렇게 많이 오니까 말야."

 "텐마, 크림."



 아도니스가 여러 차례 말하고 난 뒤에야 미츠루는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낼름 핥았다. 아마 손가락보다는 뺨을 가로지르는 크림 쪽을 말한 것일 테지만, 묻은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짐짓 어른스레 말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막무가내로 보채는 미츠루와, 그런 미츠루에게 제각기 할 말을 하는 아도니스와 마다라의 모습은 대화라기 보다는 서로가 할 말만 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아라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성이 넘치는 건 아무래도 좋다 치지만, 이렇게 정신 없는 시장통 분위기까지 좋은 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왜 도장만 남겨둘 만큼 급하게 출국해야 했는지, 부부장인 아도니스가 아닌 하필 제 사물함에 넣었는지는 어물쩍 넘어가버린 것 같다. 화려한 선물 공세가 어느 정도는 먹힌 셈이다. 미츠루는 물론, 아도니스의 목에 걸린 하얀 오카리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싫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 취급받은 건 분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티슈를 찾는 아도니스에게 제 것을 건네며 한 마디 보탰다.



 "맛있는 걸 준다고 아무나 따라가진 말아, 미츠루쨩."

 "너무한데, 아라시상! 나는 유괴범이 아니라고오?"

 "부장은 전적이 있다."

 "아도니스상도?!"



 가만, 조금 전 미츠루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라시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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