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후 무도장에는 짧은 기합과 맨발이 바닥 위로 미끄러지는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꽉 움켜쥔 주먹이 쿠로를 향해 연달아 날아왔다. 공기를 가르는 기세 만큼은 매섭다. 쿠로는 테토라의 정권을 어렵지 않게 흘려보냈다. 헛점투성이인 옆구리를 후려치자, 테토라는 신음을 삼키며 몇 걸음 물러났다. 이내 이를 악 물고 다시 덤볐지만, 녀석의 주먹에는 잡념이 너무 많았다. 쿠로가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녀석과 대련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쿠로는 섣부르게 품으로 파고들어온 테토라의 턱을 올려치고 곧바로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탓에 정수리로 날아오는 쿠로의 손날을 미처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테토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 위로 두 팔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쿠로의 공격이 이어지지 않았고, 온몸에 힘주어 긴장하던 테토라도 이내 한쪽 눈을 슬쩍 떴다. 제 머리 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의아한 듯 보였다. 당연하다. 쿠로는 진작에 테토라 앞에 쪼그려 앉아있었기 때문에. 테토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보란 듯, 테토라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타격음과 짧은 비명이 무도장 창문을 넘었다.

 하얀 이마가 금세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아프긴 아팠는지, 테토라는 이마를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쿠로로서는 봐준다고 한 건데, 저 정도면 혹이 날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평소라면 더 할 수 있다며 덤볐을 테토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무리 인사를 한 뒤, 뒷정리하는 녀석의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 오늘 아침도 꼭 지금과 같은 표정이었다. 테토라를 지켜봐 온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은 덕분에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 일듯 훤하다. 

 쿠로는 늘 그랬듯,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네기보다 침묵을 택했다. 

 3월, 여러모로 학교 안이 뒤숭숭한 시기이다. 졸업하는 이들은 물론, 학교에 남아 선배를 배웅해야 하는 후배의 심정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테토라의 고민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 듯 보였다. 



 '대장,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쉬는 시간, 3학년 교실까지 올라와 대련을 청하던 테토라를 보며 그런 확신이 들었다. 유성대의 답례제 준비가 잘 안 풀리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케이토와 소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번 답례제에 신청 서류를 내지 않은 유닛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언데드, 홍월, 그리고 유성대. 

 쿠로는 기꺼이 승낙했다. 안 그래도 줄곧 일에 치여서 부활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좀이 쑤시던 차였다. 졸업하면 언제 또 녀석과 주먹을 맞댈 수 있을 지도 모르고. 핑계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녀석을 지켜보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시간이 있다. 쿠로 역시 잘 알고 있다. 테토라라면 아마 옳은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쿠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정도였다.

 그래서, 흘린 땀 만큼의 도움은 되었을까.

 쿠로는 셔츠 단추를 잠그는 테토라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힘없이 굽었던 어깨가 화들짝 튀어 오른다. 영문 모르고 저를 올려다보는 테토라를 향해 쿠로가 씩 웃었다.



 "힘내라고, 유성 레드."

 "……그 이름은 정식으로 물려받은 다음에 불러주십쇼."



 그제야 겨우, 테토라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주1테츠쿠로 참가분 백업(17.1.12)







 손바닥에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문자가 왔을 때 울리는 짧은 진동이었다. 밤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이 늦은 시간에 문자를 보낼 사람은 한 명뿐이다. 테토라는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내내 손에서 놓지 못한 탓에 휴대폰 액정이 손바닥의 체온으로 미지근했다. 

 기대와 달리, 문자 수신함에 남은 것은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스팸 문자였다. 특수문자 나열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문자 내용이나 송신 번호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괜히 액정을 여러 번 껐다 켜길 반복하던 테토라는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었다. 문자 수신함을 확인하는 짧은 시간, 테토라의 손가락은 이미 새빨갛게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토라는 이미 오랜 시간 바깥에 있었고, 두꺼운 양말 속 발가락이 다 시릴 정도로 날이 추웠다. 몸에서도 으슬으슬한 한기가 올라오는 걸로 보아, 내일 아침부터 몸살로 앓을 것이 훤하다. 테토라는 시린 손끝을 후후 불며 어루만졌다. 하얀 입김이 손가락을 헤치며 밤공기에 스며들었다.

 이번엔 정말 대장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일요일 밤, 예정대로라면 쿠로와 끝내주는 데이트를 하고 슬슬 헤어질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리면 쿠로가 못 이기는 척 테토라의 손을 잡아주었을, 그런 시간. 그러나 오늘 테토라는 쿠로를 만나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서로 바쁜 일에 치이며 몇 번씩 일정을 바꾸다 아예 틀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미안하지만 약속은 취소해야겠다는 문자를 받은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늦어도 괜찮으니 기다리겠다고 바로 답장을 보냈지만, 쿠로가 테토라의 문자를 확인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 뒤로 문자 한 통, 전화 한 번이 없었다. 어쩌면 아직도 일하느라 문자조차 확인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 그럼에도 테토라는 약속시간에 맞추어 쿠로의 집 앞으로 나왔고, 여지껏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종일 굶어서 속은 쓰리고, 컨디션은 최악이다. 그보다 걱정인 것은 끝끝내 쿠로의 얼굴 한 번 못본 채 돌아가야 할 일이었다. 미련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테토라는 다만, 모처럼 만의 휴일을 쿠로와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담벼락에 등을 기댄 테토라가 이내 미끄러지듯 쭈그려 앉았다. 꽤 오랜 시간을 실낱같은 희망에 기댄 탓에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양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목덜미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테토라가 언제 올 지 모르는 자신을 마냥 기다린 사실을 알았을 때, 쿠로가 어떻게 반응할 지는 불보듯 뻔했다. 아직도 쿠로는 남의 미련함마저 자기 일로 자책할 만큼 요령 없는 사람이고, 테토라는 그런 쿠로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쿠로가 오기 전에 돌아가고, 나중에 연락이 오면 아닌 척 잡아 뗄 생각이다. 




 "답장이 없으셔서 그냥 집에서 쉬었슴다. 약속은 또 잡으면 되고. 오늘만 날은 아닌 거 암다. 저도 어린애는 아니니까요……. "




 나중에 쿠로에게 할 말을 미리 연습하듯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지금이라도 좋으니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애초에 자제할 수 있었다면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에도 능숙해지는 일이라면, 지금의 테토라는 아직도 쿠로를 처음 만난 날의 풋내기 꼬마나 다름없었다. 

 이제 정말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테토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눈 앞에 쿠로가 있었다. 드디어 헛것이 보이는 걸까? 하지만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이나, 불규칙한 호흡을 따라 흩어지는 입김은 진짜였다. 테토라가 눈을 몇 번이고 깜박이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테츠."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얼굴도, 쥐어짜 내듯 저를 부른 목소리도 키류 쿠로 본인이었다. 

 테토라가 벼락처럼 몸을 일으켜 쿠로의 허리를 들이박듯 안겨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내 중심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쿠로는 아프다는 말도 없이 테토라를 끌어안았다. 

 사실, 두 사람에게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쿠로-테토라 첫 만남 날조 주의*




 열두 시 정각이 되기가 무섭게 쿠로의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늦은 시간까지 옷을 짓던 쿠로가 잠깐 눈을 붙인 시간이었다.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쿠로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일어났다. 목덜미가 절로 서늘해지는 꿈을 꾸었다. 쿠로는 한동안 전화를 받기는커녕, 식은땀이 흥건한 두 손바닥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꿈에서 보았던 모습이 망막에 새겨진 듯 눈앞에 끈질기게 맴돌았다. 같은 멜로디가 꽤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도 전화 벨은 끈질기게 울리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쿠로가 액정을 확인했다. 테토라에게 온 전화였다.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일까. 손바닥을 허리춤에 몇 번 문지르고 전화를 받았더니,




 -"……대장?"




 눈치라도 보듯, 테토라가 평소보다 조심스레 쿠로를 불렀다.




 "왜 그러냐, 테츠."

 -"그. 대장, 혹시 제가 깨운 검까?"




 마침 목도 잠겨있겠다, 전화도 늦게서야 받았겠다, 테토라가 오해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잠을 깨운 건 맞지만, 쿠로로서는 차라리 깨워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아니, 딴생각 좀 하느라. 그보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아 참."




 영 전화를 받지 않아서 용건마저 잊어버리고 내내 마음을 썼던 모양이다. 혼자 중얼거리며 수화기 너머로 머리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 쿠로는 피식 웃었다.




 -"생일 축하드림다, 대장!"

 "생일?"

 -"대장도 참, 모르는 척하시기 임까? 올해는 제가 가장 먼저 축하드리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슴다. 제가 첫 번째 맞슴까?"

 "어, 어어……. 아마도 그런 거 같은데."




 일찍 자는 습관이 몸에 밴 테토라는 열한 시를 전후로 칼같이 잠들곤 한다. 열 시만 넘어도 졸음이 슬슬 밀려오는지 크게 하품을 하거나 눈을 반쯤 감고 멍하게 있는 모습을, 쿠로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런 테토라이니, 평소에는 곤히 자고 있을 이 시간까지 잠들지 않기 위해 제법 노력했을 것이다. 고작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사실, 쿠로는 테토라와 몇 마디 더 나눈 뒤에야 녀석이 축하하는 것이 자신의 생일임을 깨달았다. 월과 날짜의 숫자 들을 게으르게 꿰어맞추며 천천히 오늘이 1월 26일이고 그 날은 자신이 생일임을 새삼 인지한 것이다. 




 -"대장, 대장! 제 얘기 듣고 계심까?"

 "아, 미안. 잘 안 들려서, 다시 얘기해줄 수 있냐?"




 테토라는 짜증 내는 기색 하나 없이 예,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저 대장께 드릴 선물도 준비했슴다. 선물도 드릴 겸 내일 아침에 댁까지 모시러 가도 되겠슴까?"

 "뭘 그렇게까지 해. 선물 정도는 학교에서 줘도 되잖아."

 -"아님다! 축하도 선물도 제가 가장 먼저 해드릴 거라고 정해뒀슴다. 오늘은 제게도 특별한 날이고요. 그러니까 제가 모시러 가겠슴다!"

 "나 참, 허락받는 게 아니잖냐. 어쨌든 마음대로 해."

 -"감사함다, 대장! 헤헤."




 테토라는 같은반인 토모야나 하지메가 선물을 고르는 데 도움을 많이 줬다는 이야기나, 그 밖에도 유성대 동료들이나 옆 반 친구들에게도 이런저런 자문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떠들었다. 사실은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치아키가 필사적으로 말려서 포기했다는 둥, 선물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대단하지는 않다는 둥, 언젠가는 자기도 직접 만든 도시락을 대접하고 싶다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들이었다. 테토라가 며칠 전부터 무슨 꿍꿍이가 있는 사람처럼 굴며 사소한 것을 묻고 혼자 고민하던 건 오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날을 대단한 날인 양 고민했을 테토라를 생각하면 쿠로는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냥 기분이 좋은 테토라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성의껏 수다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봤자 응, 그러냐, 정도의 단조로운 반응이었지만 테토라는 그마저도 좋은 듯한 기색이었다.




 -"대장."




 한참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던 테토라가 목을 두어 번 가다듬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쿠로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말씀드렸지만, 오늘은 저에게도 특별한 날임다."

 "그러냐."

 -"저희 처음 만난 날, 기억하고 계심까? 대장은 그날 저를 처음 보셨겠지만, 저는 훨씬 전부터 대장을 알고 있었슴다."




 쿠로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까만 머리통에 빨간 브릿지를 드문드문 물들인 당돌한 녀석을, 한껏 상기된 얼굴과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을 한 번이라도 잊었을 리 없다. 쿠로는 한눈에 그 어설픈 브릿지가 자신을 따라 물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테토라의 시선에 어린 동경을 읽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부터 주먹 좀 쓰는 녀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쿠로에게 그런 시선쯤은 익숙했다. 하지만 테토라는 조금 달랐다. 테토라는 악명 높은 불량배 키류 쿠로가 아닌, 아이돌 유닛 홍월의 일원인 키류 쿠로를 보고 있었다.




 -"대장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저는, 음. 뭐랄까, 대장이라면 평생 따라가도 좋다고 생각했슴다. 그 무대에서 가장 빛나고 계셨던 대장이니까요. 그때부터 저는 대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슴다. 무대 아래의 대장도 누구보다 강하고 멋있고, 존경할만한 분이셨슴다. 그런 대장의 곁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슴다." 




 테토라의 말과 행동에는 가식이 없었다. 그래서 쿠로는 녀석이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목구멍 안쪽으로 진득한 감정이 고여서 이내 숨통을 꽉 틀어막는 기분이 들었다. 쿠로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큰 소리를 낼 것만 같아서였다. 

 수화기 너머의 테토라는, 그런 쿠로의 사정따위는 조금도 모른다.




 -"대장은 제 이상향 그 자체임다. ……대장이, 저의 대장이 되어주셔서 정말 기쁨다."

 "……." 

 -"감사합니다, 대장."




 어쩌면, 쿠로가 막고 싶었던 것은 테토라의 입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귀였을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쿠로가 침묵을 지키자, 덩달아 입을 다물었던 테토라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쿠로를 민망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하, 아하하, 갑자기 닭살 돋는 말을 해버렸네요. 죄송함다. 그치만 오늘 같은 날이니까 한 번만 봐주십쇼. 대장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슴다."



 문득 쿠로는, 어쩌면 테토라가 자신에게 어떠한 대답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장 쿠로에게 녀석의 의중을 헤아릴만한 여유는 없었다. 다만 이대로 멋쩍어 아무 말 못하고 있다고 오해하길 기도할 뿐이었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았슴다. 그럼 아침에 뵙겠슴다. 안녕히 주무십쇼!"




 테토라의 목소리가 끊어진 방 안에는 지독한 정적만 남겨져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제가 뭘 하던 중이었는지 더듬다, 뒤늦게 옷을 만들던 중이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자기 전까지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쿠로는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아 한쪽으로 기우는 몸을 바로 가누며, 간신히 옷감과 바늘을 잡았다. 그러나 바로, 실을 몇 번 꿰어 보지도 못하고 내려놓았다. 지금 이 상태로 어쭙잖게 손을 댔다가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국, 쿠로는 조금 전 테토라와 했던 통화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막 유메노사키 학원에 입학했을 때라면 또 모를까, 지금의 쿠로라면 얼마든지 넉살 좋게 대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이야기라면 직접 만나서 하라고 부드럽게 주의를 줄 수도 있었고, 대단찮은 나를 추켜세워도 나오는 건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테토라에게는 그런 빈말을 주워삼키며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네가 좋아하는 건 대외적으로 잘 만들어진 내 모습이라고, 그런 속죄를 하는 상상을 수도없이 삼키는 나날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테토라는 허상뿐인 아이돌 키류 쿠로를 누구보다 존경했다. 그래서 쿠로는 길을 잃고 헤매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빠져 허우적거려야했다. 쿠로는 눈을 감았다. 꿈에서 보았던, 숨겨온 자신의 과거를 알고 배신감으로 일그러진 테토라의 얼굴이 눈꺼풀 아래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언제까지 녀석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까? 이 비참한 기분을 애써 삼키며 아닌 척 굴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라도, 테토라를 속여야 하는 걸까?


 쿠로는 어느샌가 테토라를 내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애초에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대장으로 부르게 내버려 두지도 말았어야 했다. 가까이 둬서는 안 됐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거짓말이다. 

사실, 쿠로는 누구보다 테토라를 좋아했고, 테토라에게 위안을 받았고, 그래서 녀석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쿠로에게는 테토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선택지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이 테토라에게 최선의 길인지 알면서도 외면하고 타협했다. 처음부터 선택은 쿠로가 아닌 테토라의 몫이었는데.


 그리고 이제서야, 쿠로는 테토라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직면했다.


 옷감과 재봉 도구를 정리한 쿠로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조금이라도 자려면 침대에 누워있는 편이 나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평소처럼 도시락을 세 개 준비하고, 테토라가 집에 오면 먹을 수 있도록 간단한 샌드위치도 만들 것이다. 동생을 깨워 아침을 먹이고 뒷정리가 끝날 즈음 테토라가 도착하면 좋을 텐데. 학교에 가면 여느 때처럼 무도장에서 아침 훈련을 하고, 그리고 교실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A반에 갈 것이다. 케이토에게 볼 일이 있었다. 아마 녀석은 찬성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해야했다.

 그 날 밤, 키류 쿠로는 마지막 용왕전을 결심했다.










*쿠로 동생 날조설정 주의*






 동생도, 이제 그럴만한 나이가 된 것 같다. 

 쿠로는 화장품 코너 앞을 떠날 줄 모르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어쩐지 저 작은 아이가 한 뼘은 더 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동생은 최근 들어 부쩍 스스로 꾸미는데 흥미를 보였다. 옷 한 벌을 사도 그냥 고르지 않았고, 아침마다 어떻게 머리를 묶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었다. 마냥 어린아이인 줄 알았던 동생도 조금씩 커 가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초등학생인데, 립스틱이나 마스카라 같은 건 이르지 않을까? 쿠로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슬슬 집에 가자. 저녁 먹어야지."




 동생은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선 자리에서 쿠로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꼭 다문 입술에서 이걸 꼭 갖고야 말겠다는 다짐 같은 게 보였다. 쿠로도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보이지 않는 공이 다섯 걸음 남짓한 공간을 두고 두 사람 눈에서 눈으로 치열하게 오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쿠로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애초에, 쿠로는 동생에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무얼 그리 보고 있나 했더니 손톱에 바르는 네일 폴리쉬였다. 유닛 활동을 할 때 종종 사용하는 물건이니만큼 쿠로에게도 낯설지 않은 물건이다. 집에는 쓰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 동생에게는 퍽 낯선 물건일 것이다.




 "이게 가지고 싶어?"

 "오늘 마나미가 손톱에 이거 칠하고 왔어."

 "너한텐 아직 이르지 않냐?"

 "근데 그 기집애가 너네 집에 이런 건 없냐고 그러잖아."

 "이거 얼맙니까?"

 "그 색 말고 이거."




 동생이 내민 빨간색 네일 폴리쉬를 홀린 듯 결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야, 쿠로는 뒤늦게 자괴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다 받아주는 것 만이 사랑이 아니라고 질책하던 케이토가 떠올랐다. 꽤 자주 듣는 소리였고, 늘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고 얼버무렸지만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쿠로는 동생에 관련된 일이면 쉽게 이성을 놓는다. 일로 바쁜 아버지는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우니, 자연스럽게 동생에 관한 것은 모두 쿠로의 몫이다. 단순한 오빠 노릇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데다 사색에는 영 자신 없는 쿠로가 부모의 역할까지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복잡한 심정까지 알 리 없는 동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냥 신이 났다.




 "이거 언제 칠해줄 거야?"

 "저녁 먹고."

 "설거지는 내가 할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동생이 기뻐하면 그걸로도 마음이 풀어진다. 그래서 아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며 어물쩍 넘겨버리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무래도 좋은 오빠가 되긴 그른 것 같다. 쿠로는 동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니. 넌 TV라도 보면서 기다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 아래서 기분 좋게 미끄러졌다.




* * *




 그로부터 며칠쯤 지난 다음일 것이다.

 부활동이 있는 날이었고, 테토라가 쿠로의 손발에 몇 번쯤 드러눕고 일어나길 반복하다가 이윽고 완전히 뻗어버렸을 때였다. 두 사람이 대련을 할 적이면 테토라가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었고, 그것이 으레 대련의 마침표가 되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며 한 번 더 부탁드린다며 더듬거리는 녀석을 더 굴릴 수는 없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다."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툭 치니, 중심을 잃고 고꾸라지는 걸 보면 이번엔 좀 심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테토라는 감사합니다, 라거나 대장은 역시 강함다, 하고 간헐적으로 중얼거렸다. 포기를 모르고 도전하는 녀석이 내일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는 것도 쿠로의 소소한 낙 중 하나였다.

 매트에 엎드려 시근덕거리던 테토라가 문득 쿠로의 발을 보았다.



 "어라, 대장, 발톱이."



 미처 이어지지 못한 말은 쿠로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발톱마다 피라도 난 마냥 시뻘겠다. 정확히는 발톱과 그 주변 살 위로 빨간 것이 덕지덕지 묻었다. 어리둥절해서 만져보니,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이 딱 매니큐어의 맨질맨질한 느낌이었다. 쿠로는 며칠 전 동생에게 발라준 빨간 네일 폴리쉬를 기억해냈다.




 "매니큐어임까?"

 "어, 동생이 바른 것 같은데."




 쿠로는 멋쩍게 웃으며 두 발을 끌어모았다. 상대적으로 작은 새끼 발톱은 아예 발가락 전체가 폴리쉬로 뒤덮혀있었다. 한숨 돌린 테토라가 느릿하게 몸을 바로세웠다.




 "하긴, 대장한테 그런 장난을 칠 수 있는건 동생분 뿐이죠."

 "뭐 그렇지. 며칠 전에 사달라고 졸라서, 매니큐어를 사줬거든. 엄청 좋아하더라고. 그걸로 나한테 장난을 쳤을 줄은……."




 동생과 친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쿠로가 정확히 아는 것은 없었다. 그 '마나미'란 친구랑 이후로도 사소한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어렸을 때처럼 미주알고주알 얘기해주진 않았다. 다만 때때로 제 빨간 손톱을 뿌듯하게 매만지는 동생을 보며 마음에 드는가보다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왜 제 발톱에 장난을 친 건지, 크고 넓은 발톱이 딱 좋은 도화지처럼 보인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쿠로는 모른다.

 테토라는 마냥 웃는 쿠로를 한 번, 그리고 쿠로의 빨간 발톱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냥 두시는 검까?"

 "발톱이니까 상관없지 않냐. 어차피, 이걸 볼 사람은 너나 동생 정도고."

 "하지만 대장, 다음 주에 대회가 있지 않슴까. 그러고 나가시는 검까?"

 "그럼 그때 지우지 뭐."



 폴리쉬는 발톱 뿌리 쪽에 둥글게 뭉쳐있기도 했고, 발톱 전체에 고르게 발리지 않아 허연 살색이 그대로 보이기도 했다. 특수 폴리쉬도 아니니 손톱으로 긁으면 바로 떨어질 것이다.

 어찌 되었건, 쿠로는 이 빨간 매니큐어를 지울 수 없었다.




* * *




 그리고 바로 다음날,




 "대장, 이거 보십쇼!"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무도장에 들어온 테토라가 다짜고짜 양말을 벗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쿠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는 유성 블랙이니까, 까만색임다."




 쿠로의 빨간 발톱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테토라는 제 까만 발톱을 내보이며 씩 웃었다.

 두 사람의 빨갛고 까만 발톱은 함께, 조금씩, 잘게 조각나는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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